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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조위.photo=YTN 캡쳐

세월호

세월호, 1000일의 기억 ①… 특조위는 왜,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내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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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9일은 진도 앞바다에서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해, 300여명이 몰살된 지 1000일이 되는 날이다.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세월호 조사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침몰 1000일이 된 지금, 세월호는 아직도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고, 조사위원회는 161쪽의 ‘중간점검보고서’만 낸 채 지난해 9월 30일자로 해산됐다. ▲위원회는 왜 이렇게 부실한 결과 밖에 내지 못했나. ▲그 이유를 2회에 걸쳐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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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 우리 국민은 세월호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야당과 세월호 유족이 정부 여당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반년을 보낸 끝에, 세월호 유족들이 추천한 이석태 조사위원장을 수장으로 한 조사위원회가 2015년 초에 출범했다. 

조사위는 여당과 야당이 각각 5명씩, 대법원장과 대한변호사협회장이 각각 2명씩,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가족대표회의가 3명을 선출하여 총 위원 17명으로 구성됐다. 

정부 여당 측 위원보다 야당과 세월호 유족 측에서 뽑은 위원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시민들은 ‘세월호가 인양되고 진상이 조사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침몰 1000일이 된 지금, 세월호는 아직도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고, 조사위원회는 161쪽의 ‘중간점검보고서’만 낸 채 지난해 9월 30일자로 해산됐다.  



‘중간’ 보고서만 내고 헤어진 조사위원회

세월호 조사위원회는 왜 조사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까? 이는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조사위원회나 세월호 유족들은 이를 “정부 여당의 방해 공작 때문에”라고 답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지난 3년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다뤄온 내가 보기에, 이는 사실이다. 정부 여당은 집요하게 조사를 방해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일부’에게 넘기는 행태는 지양돼야 한다. 언론이나 시민, 세월호 조사위원회에서는 문제가 없었는지를 찾아야 할 것이며, 심지어 이석태 조사위원장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점검해 봐야 ‘전체’가 드러날 것이다. 세월호는 인양되어 조사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2기 조사위원회’가 꾸려져야 하고, 그들이 진상 조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현재 우리들의 자기 성찰은 필수적일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1)정부 여당 (2)언론 (3)시민 (4)조사위원회 순으로 문제를 점검해 보겠다. 이는 2016년 11월11일, 12월2일, 12월 20일 세차례에 걸친 이석태위원장과의 인터뷰, 그에 이은 그와의 이메일, 세월호 중간점검보고서 그리고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한 것이다. 

(1) 정부 여당

조사위원회는 세월호의 진상을 차분히 조사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한 위원은 “정부 여당의 공격이 너무나 집요하고 은밀하고 체계적이었으며 때로는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라며 “조사위원회 위원 17명 중 여당 측 위원 5명은 내부에서 교란작전을 펼쳤다”고 했다. 

그는 “여당측 위원들이 2015년 초반부터 방해 공작을 시작했다”고 했다.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였던 김재원 의원은 그해 1월16일 “특조위 규모가 너무 크다”며 특조위를 ‘세금 도둑’에 비유했다. 세월호법이 사무처 정원을 120명 이하로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5명의 상임위원을 포함해 125명으로 구성된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공무원총정원령’에서 정무직은 전체 정원에서 별도로 두고 있으므로, 이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었다.

김재원 의원의 발언을 신호탄으로, 특조위 활동에 ‘걸림돌’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특조위 업무는 정지됐다. 특조위가 활동을 하려면 예산이 편성되고 시행령이 확정돼야 한다. 그런데 기획재정부 등 정부 부처와의 실무협의가 중단된 것이다. 

여당 추천인 황전원 특조위원 예정자는 2015년 1월18일과 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해 “특조위 예산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금액”이라며 “설립 준비단을 즉각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조대환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 예정자는 그해 1월 22일 특조위 파견 공무원 4명에 대한 정부 복귀를 이석태 위원장 예정자의 재가 없이 무단으로 지시했다. 그날로 해수부는 해당 공무원의 ‘지원근무를 면(免)’하는 인사 발령을 냈다. 

이후 위원회는 파견 공무원 14명 중 이석태 위원장 지명 7명 만이 출근하는 등 파행을 겪었으며, 예산도 깎였다. 처음에 241억원이었던 예산은 결국 총 150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조대환 부위원장.photo=YTN 캡쳐

인원도 ‘반쪽’ 예산도 ‘반쪽’

다른 위원은 “여당 추천 위원들이 세월호 조사위원회의 ‘내부 방해꾼’이었고 ‘감시조’ 였다”고 했다. 조대환 부위원장은 “(이석태) 위원장이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고,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지 아니하였을뿐더러, 채용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등 위법행위가 엄중하여 위원장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해 6월26일부터 결근, 7월23일 대통령에 의해서 사표가 수리됐다. 그는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의 마지막 ‘민정수석’으로 선임됐다. 

여당측 위원들은 세월호 진상 조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청와대 보호’를 위해서는 몸을 던졌다. 세월호 조사위원회는 세월호와 관련해서 외부로부터 조사해야 할 항목을 제안받는 ‘신청 사건’ 제도를 두었다. 9월부터 신청 사건이 200건 넘게 들어왔다. 

2015년 11월23일 제19차위원회 때는 ‘청와대 등의 참사대응 관련 업무적정성 등에 관한 조사’에 대해 의결했다. 당시에 금기어였던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2014년 유가족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을 주면, 청와대건 어디건 막 쑤시고 다닐 것 아니냐”고 발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당 추천의 고영주, 석동현, 차기환, 황전원 위원이 이 의결에 반대해 즉각 퇴장했다. 

나는 이에 대해서 이 위원장에게 질문했다. “당시에는 대통령의 서슬이 퍼런 시기였으니까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 조사는 뒤로 돌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비정치적’인 문제부터 먼저 조사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 아니었을까?”라고. 이에 대해 이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물론이다. 우리도 이 사안이 불거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의 7시간이란 표현으로 특조위 활동에 정치색을 입히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런데도 여당측 위원들은 이를 문제삼았고, 결국 이것이 조사에 방해가 됐다.”  


세월호 1차 청문회.photo=JTBC 캡쳐

국회 대신 YWCA회관에서 청문회

2015년 12월에 열린 1차 청문회는 국회가 아닌 YWCA회관 4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조사위원들에게 이것은 ‘국회의 비협조’로 받아들여졌다. 세월호 희생자가 304명인데 방청석은 150석 뿐이었다. “유족들과 취재진이 모인 방청석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비좁아 보였다”고 경향신문은 보도했다. 유족들은 방청을 위해 오전 6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청문회가 열린 사흘 내내 여당 추천 위원 5명은 청문회에 불참했다. 이 중 황전원·석동원 위원은 지역 선관위에 2016년 총선 예비후보 등록을 했고, 고영주 위원은 청문회 기간 내내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실에 출근해 업무를 봤다. 차기환 위원도 청문회 기간 동안 자신이 수임한 재판에서 변론하고 KBS 이사회에 참석하는 등의 일정을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특조위원 신분이었다”고 한다.  

2015년 11월19일에 터진 ‘해수부 문건’ 사건은 여당 추천 위원들과 정부가 조직적으로 연계돼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머니투데이(the300)는 이날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여당 추천 위원들에 대한 ‘행동 지침’을 담은 해양수산부 문건을 공개했다. 문건은 “BH(청와대) 조사 관련 사항은 적극 대응한다”면서 “여당 추천 위원들이 의결과정상 문제를 지속 제기하고, 필요시 여당 추천 위원 전원 사퇴의사를 표명한다”고 했다. 

여당 측 위원들의 행동은 이 문건에 적힌 것과 일치했다. 그들이 이 문건에 적힌 ‘행동지침’에 따라 행동한 것 아니냐는 의혹의 배경이다. 문건에는 또 “여당 추천 위원이 전원 사퇴한 후에 위원회 구성 및 의사결정 공정성에 문제가 발생함을 집중 부각한다”는 후속조치까지 제시돼 있다. 

문건은 여당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특조위에 소위 회의록을 요청하고 비정상적·편향적 위원회 운영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는 행동 지침을 명시했다. 문건은 또 “파견공무원과 여당 추천 위원의 정례 미팅을 통해 주요 안건 및 의사결정 정보를 공유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한다”고도 했다. 

야당측 특조위원들은 “여당측 위원들이 세월호조사위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말했다. 여당측 위원 4명은 ‘청와대 업무 적정성 조사’ 의결 이후, 특조위의 모든 회의에 불참했다. 석동현 위원은 11월25일에, 황전원 위원은 12월14일에 새누리당에 입당함으로써 ‘당연 퇴직’ 처리됐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았다. 


황전원 위원.photo=YTN 캡쳐

퇴직한 사람을 다시 임명하는 ‘해프닝’

새누리당은 조대환 부위원장이 사퇴한 후에 이헌 위원을 부위원장으로 지명했고, 그가 ‘이석태 위원장의 전횡’을 이유로 2016년 2월11일 사퇴하자 후임으로 이미 ‘당연 퇴직’ 처리된 황전원 위원을 다시 지명했다. 

그는 2016년 5월25일 국회에서 정식 임명됐다. 그러나 세월호 조사위를 무력화시키는 데 앞장섰고 새누리당에 입당함으로써 위원 자격을 상실한 황위원에게 다시 부위원장직을 수행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부위원장 선출은 저지됐다. 이후 ‘세월호’는 부위원장을 공석으로 남겼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은 세월호조사위의 골간이 되는 영(令)이다. 그런데 2015년 초부터 이 시행령을 둘러싸고 정부와 조사위가 대립했다. 결국 조사위의 조사 대상인 해양수산부가 시행령을 주도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딱 맞는 상황에서 시행령이 만들어진 셈이다. 다수의 특조위원들이 “이 시행령은 조사 기간 내내 조사에 걸림돌이 됐다”고 지적했다. 

2015년 3월27일 입법예고된 시행령의 내용은, 세월호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무력화시키고 사무처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세월호 조사위원회는 위원장 직속으로 △진상규명 소위원회, △안전사회 소위원회, △지원 소위원회가 있었다. 세월호 조사위의 업무를 효율성 있게 추진하려면 소위원장의 업무 지휘, 감독권이 명확해야 했다. 그래서 특조위가 마련한 시행령은 이를 규정했다. 그러나 정부 시행령에서는 이것이 삭제됐다.

조사위원회에는 이와 별도로 사무처가 있었고, 그 밑에 행정지원실과 진상규명국이 있었다. 특조위 업무를 종합, 조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지원실’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기획행정담당관이었다. 진상규명 업무의 추진상황을 점검하고 청문회를 실시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진상규명국’에서 가장 선임은 조사1과장이었다. 그러므로 행정지원실장 진상규명국장 기획행정담당관 조사1과장은 조사위원회의 핵심 보직이 된다. 그런데 시행령은 이 보직들을 해수부에서 파견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당시 경제부총리겸 기획재정부장관 최경환.photo=유튜브 캡쳐

조사 대상인 해수부가 ‘시행령’ 주도

조사위원회는 ‘위원14명 중 10인의 찬성’으로 특별법 시행령안 철회를 요구했다. 이석태 위원장은 2015년 4월27일, 광화문 광장에서 농성까지 했다. 결국 그해 4월30일 ‘해수부 공무원을 기재부와 법무부 공무원으로 대체하는’ 선에서 시행령이 차관회의를 통과했고, 이 위원장은 5월3일 농성을 중단했다. 

“정부 공무원들이 조사관들 위에 군림하면서 소속 기관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조사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 조사위는 행정지원실장 기획행정담당관 조사1과장에 대한 파견요청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소심하게’ 저항했다. 

여기에 정부는 예산을 지급하지 않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2015년 7월17일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겸 기획재정부장관은 국회에서 “행정지원실장 기획행정담당관 조사1과장이 없는 기관에 예산을 편성,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공무원 파견 요청은 파견을 받는 기관인 특조위 위원장에게 그 권한이 있으며, 조사위 내부의 일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으나, 조사위는 조사 업무를 진행시키기 위해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진상규명국장은 끝내 임명되지 못한 채 특조위 기간이 끝났다. 특조위는 공모 과정을 거쳐 2015년 11월19일 검찰 출신 강석정 변호사를 후보자로 선발했다. 별정직이지만 고위 공무원에 해당되어 인사혁신처와 청와대의 인사 검증까지 마쳤으나, 대통령 임명 결재가 나지 않았다. 뚜렷한 이유도 발표되지 않았다.

세월호 조사 기간도 단축됐다. 세월호 특별법은 2015년 1월1일부터 시행되도록 규정돼 있으나 청와대의 ‘인사검증’이 미뤄져, 3월초에나 위원들이 임명됐다. 조사위가 조사 인력을 채용하고 예산을 지급받은 것은 그해 8월이었다. 그러니 1년 6개월의 활동 기간 중 7개월 이상을 뺏긴 셈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국회도 인식하고 있었다. 2015년 5월29일, 당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개정을 겨냥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고, 같은 날 국회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6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해 ‘배신의 정치’를 거론하며 공개 비판했다. 유 의원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고, 이 법안은 국회의 재의(再議) 없이 그대로 폐기됐다. 

이 파동은 정치적으로 ‘세월호의 진상’을 덮는 과정에서 생긴 셈이다. 새누리당 안의 소위 ‘옥새 파동’도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된다. 대통령에게 ‘찍힌’ 유승민 의원은 2016년 4.13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유승민의 지역구인 대구 동을 지역 공천안을 추인하기 위한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하지 않음으로써, 이 지역의 새누리 공천자가 없도록 한 것이 ‘옥새 파동’이었다. 

‘세월호’에 대해 박 대통령과 친박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배척하는 ‘계파주의’로 일관했다는 평이다. 공론의 장에서 정정당당하게, 토론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문화와 능력이 새누리당에는 없었다. 만약 이것이 있었다면 ‘최순실 사태’는 애초에 발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세월호, 1000일의 기억 ②편에 계속

김왕근. 화쟁칼럼니스트, '붓다로 살다' 편집장
2017-01-09, 업데이트: 2017-01-09 19: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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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