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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화장터에 서있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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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울린 교황 연하장의 ‘원폭 소년’… 사진작가가 밝힌 현장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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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시체들은) 눈썹도 코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 아니라 고깃덩어리였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일본을 미워했던 마음이 증오에서 자비로 바뀌었습니다. ▲왜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가 조 오도넬(Joe O'donnell)은 1945년 8월 나가사키 원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연하장에 담은 ‘원폭 화장터 소년’ 사진을 촬영했다. ▲핵전쟁이 터지면, 같은 상황이 한반도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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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새해 연하장 사진이 화제다. 사진 속 소년과 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1945년 8월 9일 발생한 일본 ‘나가사키 원폭’ 사고 피해자다. 교황청은 “일본 소년이 원폭으로 사망한 동생을 화장(火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진”이라고 설명했다. 나가사키 원폭으로 인한 사망자는 3만 5000명으로 추산된다.  

이 사진은 나가사키 원폭 직후 당시 23세였던 미군 해병대 소속 사진가 조 오도넬(Joe O'donnell)이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목은 ‘화장터에 서있는 소년’(焼き場に立つ少年). 오도넬은 일본에서 머물며 4년 동안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의 후유증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동생 시신 업고 피 나도록 입술 깨문 소년

그는 이 사진을 어떻게 찍게 됐을까? 몇 년 후 오도넬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먹먹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사세보(佐世保,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군항지)에서 나가사키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작은 언덕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얀 마스크를 쓴 남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땅을 60cm 정도의 깊이로 파낸 뒤 그 주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카트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시체를 불타고 있는 구멍에 차례차례 넣고 있었습니다. 

그때 10세 정도의 소년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년은 어부바 끈을 어깨까지 동여 메고 등에 아기를 업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동생을 업고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분명히 무언가 달랐습니다. 

저는 그 소년이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 화장터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소년은 신발도 신고 있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화장터 가장자리에서 굳은 표정으로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등 뒤에 업혀 있는 아기는 깊이 잠들었는지, 작은 머리가 뒤로 젖혀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소년은 그곳에서 5~10분 동안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얀 마스크를 쓴 남성들이 조용히 소년에게 다가가 아기가 업혀 있던 끈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아기가 죽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남자들은 아기의 손과 발을 잡고 작은 몸을 뜨거운 불 위에 올려놨습니다. 

작은 육체가 불에 녹아 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불꽃이 반짝 일었습니다. 새빨간 석양과 같은 화염이 미동조차 없이 서있는 소년의 앳된 뺨을 붉게 비췄습니다. 바로 그때, 삼켜버릴 듯 불꽃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의 아랫입술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년이 너무 불꽃에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입술의 피는 흐를 새도 없이 소년의 아랫입술에 붉게 물들었습니다. 지는 해처럼 불꽃이 사그라지자, 소년은 말없이 발길을 돌려 화장터를 빠져 나갔습니다.>


해병대 복무 시절의 오도넬. 


“왜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오도넬은 나가사키 원폭의 위력에 대해 “사람이 지구에 서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파괴력”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시체들은) 눈썹도 코도, 귀도 없었다. 얼굴이 아니라 고깃덩어리였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일본을 미워했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증오에서 자비로 바뀌었습니다. 왜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도넬은 “오해하지 말라”면서 “나는 미국인으로, 미국을 사랑하며 나라를 위해 싸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모국의 잘못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죽음의 재 위를 걸었고, 눈으로 그 참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일본군은 중국과 한국에 끔찍한 일을 저질렀지만 그 어린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 아이의 어머니를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반문했다. 끝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그 원폭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100년이 지나도 잘못으로 남을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도 있습니다. 언젠가 모두가 평화를 실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차마 꺼내볼 수 없었던 사진들… 1995년에 세상에 공개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오도넬은 2대의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1대로는 군대 사진을 찍고, 다른 하나로는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집으로 돌아온 오도넬은 그 사진들을 트렁크에 넣고 잠가버렸다. 차마 두 눈으로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공개한 것은 1995년이었다. 일본에서 출간한 사진집의 제목은 ‘일본 1945년: 미국 해병대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찍은 사진’(Japan 1945 : a U.S. Marine's photographs from Ground Zero)이었다. 10년 후인 2005년에 그는 20여장의 사진을 추가해 미국에서 사진집을 재출간했다. 


사진집 표지. 

1968년까지 백악관 사진가로 활동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도넬은 워싱턴으로 이사해 사진 스튜디오를 잠시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다 가족의 소개를 받아 백악관 사진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오도넬은 1950년 10월 15일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이 한국전쟁 당시 남태평양에 있는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가졌던 회담 현장에도 있었다. 이날 회담의 목적은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할지 여부를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확인하는 것이었다.

46세가 되던 1968년, 그는 백악관 사진사 일을 그만두고 고향인 내쉬빌(Nashville)로 이사했다. LA타임스는 “일본을 촬영하는 동안 방사선에 노출되어 장애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군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참상을 담아” 

오도넬은 2007년 8월 9일 뇌졸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87세였다. 그의 사망 10주기이자, 원폭 72주년이었던 작년 8월, 일본에서 그의 사진집이 다시 출간됐다. 오도넬의 일본인 아내 키미코 사카이(Kimiko Sakai)는 “남편은 일본을 점유한 군인으로서가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일본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고 아사히신문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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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5, 업데이트: 2018-01-05 07: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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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길동